창작레지던시
송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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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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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mjsong28@naver.com
Homepage/ www.mjsong.com
학 력
2000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1996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96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주요 경력
개인전
2012 Undone / 갤러리인, 서울,2010 Being in Folding / Ctrl Gallery, Houston, USA
2009 Fishing on the Flat, 성곡미술관, 서울 / 갤러리 아트사이드, 북경, 중국
2007 Green Home / 노화랑, 서울 / 국립미술창작스튜디오, 경기 고양
2006 정원술 / 갤러리현대 윈도우갤러리, 서울
2005 풍경의 표면 / 금호미술관, 서울
수상
2010 The Sam and Adele Golden Foundation Award, USA2008 성곡미술관 내일의작가 선정
2005 금호미술관 영아티스트 선정
2004 송은미술대상전 ‘미술상(우수상)’
작업 및 작품 설명
초록이 주조색인 작품들의 주제는 회화의 평면과 그 위에 그려진 이미지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회화의 평면은 회화만이 가지는 특유의 조건이자 한계라 할 수 있는데, 그 위에 얹혀 그려지는 일종의 환영인 이미지들이 자신의 뿌리내리고 있는 평면과 어떻게 만나고 관계 맺는지 상상해 보았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초록의 포스트잇 이미지는 평면성과 이미지성의 중간자이자 가교 역할을 한다고 상정했다. 포스트잇의 상부는 바닥에 붙어 2차원의 평면성을 보이고, 하부는 공중에 떠있어 3차원의 이미지의 환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화면의 초록 포스트잇은 평면의 바탕에서 떨어져 나와 떨어져 나온 바로 그 평면에 그려진 이미지에 다시 편입해서 이미지의 일부를 이룬다. 그러므로 단순히 이미지의 바탕, 또는 지지대로서 회화의 평면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위에 그려진 환영인 이미지와 순환하고 교류하는 평면과 이미지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작품 내부의 내러티브적 요소로서 낙하산을 발목에 맨 인간이 화면에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인간은 낙하산을 하늘을 날 수 있게 하는 자유를 부여해주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바닥에 끌고 다니며 스스로 고초를 겪게 만드는 장애물로 씀으로써 스스로의 아둔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낙하산으로 자신이 구축한 초록의 영역을 다시 허물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자행한다. 어리석고 맹목적인 인간상의 풍자라 할만하다.
베이지색이 주조색인 최근작들에서는 원기둥과 같은 형상들이 주로 등장하는데, 그 내부는 물성의 변화가 있는 듯 액체로 채워져 있고, 그것은 곧 바깥으로 흘러내려 지척의 구멍으로 다시 흘러들어 간다. 이와 같이 화면에서 사건은 어떤 식으로든 발생하고 있지만, 이미지화된 물질은 결국 순환하며 원점 즉, 자신이 난 자리로 회기하고, 그 구멍은 메워져 평편한 평면으로 무심해지고 만다. 이러한 장면은 평면의 캔버스에 이미지가 생성되고 발전, 그리고 소멸하여 결국 평면으로 다시 회귀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베이지색이 주조색인 최근작들에서는 원기둥과 같은 형상들이 주로 등장하는데, 그 내부는 물성의 변화가 있는 듯 액체로 채워져 있고, 그것은 곧 바깥으로 흘러내려 지척의 구멍으로 다시 흘러들어 간다. 이와 같이 화면에서 사건은 어떤 식으로든 발생하고 있지만, 이미지화된 물질은 결국 순환하며 원점 즉, 자신이 난 자리로 회기하고, 그 구멍은 메워져 평편한 평면으로 무심해지고 만다. 이러한 장면은 평면의 캔버스에 이미지가 생성되고 발전, 그리고 소멸하여 결국 평면으로 다시 회귀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입주기간 내 창작 활동 계획
2005~2009년의 작품들 즉, 초록색의 작품들에선 그 소재들이 초록이라는 색채가 관습적으로 상징하는 것처럼 자연을 표방하고 있거나 또는 자연을 모방하는 재료로 쓰이며 이미지의 표면을 구성했다. 그 이면의 개념 틀은 회화라는 장르의 특성이자 한계라 할만한 ‘평면성(flatness)’의 문제로, 이것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스스로 회화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계기임과 동시에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예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그림에서는 내부의 이야기 구조와 외부의 평면성이 서로 간섭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두 상반된 개념의 결합가능성을 시험했었다.
근간의 작품들에서는 화면에서 보이는 사물들이 주로 원기둥과 같은 간단한 입체도형의 형상을 띠고 있고, 약간의 형태적 가감을 통해 변주되고 있다. 그 단순 형태를 이루는 색채 또한 베이지색이거나 회벽색과 같은 중성색이 주조를 이룬다. 그것은 마치 흙의 색 또는 몸의 살색과 같아서 도처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색으로, 정색하지 않으면 미처 인식되지 못하는 그런 색감들이다. 또한 그 사물들이 일으키는 사태를 보자면, 화면의 원기둥은 그 내부에서 물성의 변화가 있은 듯 액체로 채워져 있고, 그것은 곧 바깥으로 흘러내려 지척의 구멍으로 다시 흘러들어 간다. 이처럼 사건은 어떤 식으로든 발생하고 있지만, 물질은 결국 순환하며 원점으로 회기하고, 구멍은 메워져 평편하고 무심해지고 만다. 이것은 결국 또 다른 이미지들이 놀 수 있도록 편평한 바탕으로 다시 비워놓는 것과 다름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이제껏 화면 속에 어떤 개념이나 의미를 담는데 흥미를 느끼기 보단 사전에 그 바탕을 의심하고 타진해보는 것에 몰두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간의 고군분투로 – ‘그리기’라는 애초의 허튼 수작 위에 또 하나의 허튼 수작을 덧입히는 것처럼 무용(無用)해 보일 지라도 말이다. – 회화의 평면성이라는 회화 내부의 한계와 조건을 스스로 인지함과 동시에 수용할 심리적 바탕이 마련된 듯하다. 그리고 다음은 그 바탕위에 어떤 메시지와 이미지를 담을 것인가라는 원점으로부터의 과제가 다시 주어졌다.
요즘 난 내 의식을 마치 투포환 선수처럼 힘껏 저 멀리 전방에 던져놓은 느낌이다. 한편으론 내 뒤로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듯도 하다. 그래서 내 몸이 내 의식을 쫓아가는 중인지, 아니면 내 몸이 내 의식으로부터 도망하는 중인지 헷갈린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아무튼, 제풀에 지쳐서이건 합의에 의해서이건 언젠간 그 둘은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남과 동시에 괜한 불협화음으로 다시 이별을 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어리석어 보이는 숨바꼭질의 무한반복, 이 숨바꼭질의 궤적이 내 나름의 회화사(繪畫史)가 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하다.
근간의 작품들에서는 화면에서 보이는 사물들이 주로 원기둥과 같은 간단한 입체도형의 형상을 띠고 있고, 약간의 형태적 가감을 통해 변주되고 있다. 그 단순 형태를 이루는 색채 또한 베이지색이거나 회벽색과 같은 중성색이 주조를 이룬다. 그것은 마치 흙의 색 또는 몸의 살색과 같아서 도처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색으로, 정색하지 않으면 미처 인식되지 못하는 그런 색감들이다. 또한 그 사물들이 일으키는 사태를 보자면, 화면의 원기둥은 그 내부에서 물성의 변화가 있은 듯 액체로 채워져 있고, 그것은 곧 바깥으로 흘러내려 지척의 구멍으로 다시 흘러들어 간다. 이처럼 사건은 어떤 식으로든 발생하고 있지만, 물질은 결국 순환하며 원점으로 회기하고, 구멍은 메워져 평편하고 무심해지고 만다. 이것은 결국 또 다른 이미지들이 놀 수 있도록 편평한 바탕으로 다시 비워놓는 것과 다름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이제껏 화면 속에 어떤 개념이나 의미를 담는데 흥미를 느끼기 보단 사전에 그 바탕을 의심하고 타진해보는 것에 몰두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간의 고군분투로 – ‘그리기’라는 애초의 허튼 수작 위에 또 하나의 허튼 수작을 덧입히는 것처럼 무용(無用)해 보일 지라도 말이다. – 회화의 평면성이라는 회화 내부의 한계와 조건을 스스로 인지함과 동시에 수용할 심리적 바탕이 마련된 듯하다. 그리고 다음은 그 바탕위에 어떤 메시지와 이미지를 담을 것인가라는 원점으로부터의 과제가 다시 주어졌다.
요즘 난 내 의식을 마치 투포환 선수처럼 힘껏 저 멀리 전방에 던져놓은 느낌이다. 한편으론 내 뒤로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듯도 하다. 그래서 내 몸이 내 의식을 쫓아가는 중인지, 아니면 내 몸이 내 의식으로부터 도망하는 중인지 헷갈린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아무튼, 제풀에 지쳐서이건 합의에 의해서이건 언젠간 그 둘은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남과 동시에 괜한 불협화음으로 다시 이별을 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어리석어 보이는 숨바꼭질의 무한반복, 이 숨바꼭질의 궤적이 내 나름의 회화사(繪畫史)가 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