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유산: 작품 및 아카이브의 기증에 관하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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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202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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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룸×경기창작캠퍼스_<미팅앤토크 2024>_아카이브편
ㅇ 진행 및 편집 : 지가은(미팅룸 아트아카이브 연구팀 디렉터)
ㅇ 보조 진행 : 조자현(미팅룸 작품보존 연구팀 디렉터)
황정인(미팅룸 대표)
ㅇ 참여 패널 : 성석(서울시립 사진미술관 학예연구사)
유예동(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학예연구사)
이지은(前 국립현대미술관 아키비스트)
Q. 기증의 주체도 생존 작가, 작가 유족, 혹은 작가 재단 등 다양할 것 같다. 각 기증 주체별로 그 절차나 협의점에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또, 각자 입장에 따라 원하는 바가 상충할 때도 있을 것 같다. 기증을 둘러싼 작가, 기관, 유족의 역할에 대한 견해가 있다면 공유 부탁드린다.
성석 | 기증 절차상 기증 주체별로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다만, 기증 시 각자 원하는 바와 기대치가 좀 다르다. 그래서 기증자의 태도, 기증 컬렉션에 대한 기증자의 관점, 그리고 기증 시 원하는 지점에 대한 명확한 의사 표현이 중요하다. 기증자가 유족이라면, 돌아가신 부모나 배우자의 작품 및 기록물이 소중한 것은 당연하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은 이렇게 취급을 해줬으면 좋겠다든지, 어떤 자료가 어떻게 중요하다든지 기관에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실무자 입장에서도 좋다. 그래야 협의점을 유연하게 조정할 여지도 생기고 기증 후 컬렉션의 활용도도 높아진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 분들이 많다. 기증자와 기관 간의 솔직한 의사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유족이 작가의 자녀일 경우 비교적 젊은 세대여서인지 생존 작가보다 소통이 더 원활했던 경험이 있다.
서울공예박물관 기증이야기: 故권순형 작가의 작품과 자료 4,471점
출처. 서울공예박물관 공식 유튜브 채널
유예동 |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는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지 않았나 싶다. 유족보다 생존 작가(혹은 비평가나 연구자)가 소통 면에서 좀 더 수월한 부분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본인이 직접 생산하거나 수집한 자료이기 때문에 기관과의 협의점에 관한 의사 결정이 더 빠르다. 대신에 요구 사항이 더 많을 수는 있다. 이미 어느 정도 기증할 마음의 준비가 된 분들은 협의 과정을 거쳐 수월하게 기증이 이루어진다. 자료에 대한 아직 애착이 많으신 분들은, 말하자면 이 자료를 내가 아직 더 갖고 있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분들과는 한두 번 미팅하다 보면 기증이 잘 안되는 경우도 있다. 유족은 아무래도 이 자료가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어떤 걸 기증하는 게 좋은지, 어떤 조건으로 기증할 수 있는지 등을 결정하기 어려워하거나 여러 옵션 가운데 갈팡질팡하는 분도 많다. 특히 미술계에 안 계신 유족들은 이 기관에 기증하는 것이 맞는지 객관화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유족이 여러 명이면 서로 의견 일치가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진행이 잘 안된다.
이지은 | 작가나 유족 모두 기관에 기증한 작품이나 기록물이 추후 전시가 되길 많이 기대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모든 기증 컬렉션이 전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고 기관 측에서도 기증자에게 이에 대해 고지할 필요가 있다.
기증받은 자료를 정리한다면 빠진 부분, 즉 결락 부분들이 있다. 미술관이 수집 자료를 정리할 수는 있지만 이 결락 부분들을 메꿔줄 수는 없다. 그래서 유족이나 작가 입장 모두 공통적으로, 이 자료의 결락 부분을 가능한 한 많이 채워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다시 말해, 한 작가에 대해 특정한 관점으로 보여주고 싶은 지점이 있다면 이를 토대로 그 관점의 맥락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작가가 살아있을 때 많은 것을 기록해야 한다. 전시 인쇄물을 많이 만들라는 얘기가 아니라 작가의 육성 녹취, 그리고 작품과 기록과의 관계 정보들을 남겨야 한다. 예를 들어, 작품이 있고 드로잉이 있는데 이 드로잉이 작품인지, 기록인지, 혹은 작가가 이 기록을 토대로 향후 작품을 더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작가만이 결정할 수 있다. 이런 부분들을 명확하게 목록화 하지 않으면 작가 작고 후 나중에는 알 수가 없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라스트 제너레이션에게, 김용익> 전시 전경
출처.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건립백서. 사진. studio_kdkkdk
Q. 중요한 말씀이다. 향후 기증이든 매도이든, 미술관이나 재단 등의 기관에서 일괄적으로 예술가 유산이 보존되고 관리될 것을 염두에 둔다면 생존 예술가가 어떻게 자신의 작품을 기록하고 관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미리 인지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이를 인지한 상태와 아닌 상태의 결과물이 많이 다를 것이다. 이 지점은 작가가 실제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정리해야 되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지은 | 일단 구술 채록이 중요하다. 그리고 작품을 목록화할 때 명확한 출처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나중에 연구자들이 그 출처에 근거한 연구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국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é)랑 연결된다. 작품이 어디에서 어떻게 전시가 되는지,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떤 관점에서 비평가가 평론을 썼는지 등의 전시와 출판 관련 이력이 작가 아카이브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결국 기록이라는 것은 작품의 의미가 (연구로써) 후대에까지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남기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카이브를 디지털화할 때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지금까지 보여지지 않은 부분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그래서 새로운 연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자료 간의 맥락들을 만드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국립현대미술관 홍영인 작가 자료 기증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 공식 인스타그램
Q. 일단 기증이 완료된 후 작품 및 기록물이 기관 안으로 들어와 하나의 컬렉션을 이루고 나면 이것이 활용되는 방식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다. 물론 전시가 가장 가시적인 형태겠지만 최근에는 전시 외에 다른 활용 방법론도 많이 모색하는 것 같다. 기증 컬렉션의 의미나 내용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유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 나눠보면 좋겠다.
유예동 | 말씀하신대로 컬렉션 기반으로 전시를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는 전시 외에도 연구나 출판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용을 고민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작가 아카이브 외에 과연 연구자나 비평가의 아카이브도 전시 방법론으로 푸는 것이 맞는가 하는 내부적인 고민이 있다. 이 자료들을 전시물로 보여주기보다 출판과 같은 다른 형태로 매개되는 것이 훨씬 적합하지 않느냐는 것이 중론이다. 온라인상에서 이용자가 컬렉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할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고 연구 조사 가이드도 제공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아이템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도 있지만 컬렉션 관련 인물이나 관련어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차원도 늘었다. 또,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작가의 컬렉션을 꺼내 보여주기도 한다. 예전처럼 하나의 컬렉션을 전시로 푼다기보다 전반적으로 이를 횡축으로 읽어보려는 노력이 다양해졌다.
사실 이런 방식은 전시만큼 가시적으로 활용된다고 느끼기 어려워서 아직까지 기증자에게 많이 매력적으로 인식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기증자는 전시 중에서도 개인전 형태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출판도 마찬가지다. 컬렉션별로 개별 출판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출판 형식도 많다.
지가은 | 사실 이렇게 기록물 간 관계적인 맥락을 보여줄 수 있는 연구물이나 접근 방식이 미술사의 큰 흐름 안에서 그 작가의 가치나 의미를 위치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인식이 아직 좀 부족한 것 같다. 지금은 그 길로 나아가는 초기 단계로 보인다. 활용의 측면에서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강점 중 하나는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에 대한 대중적 접근성을 확대하는 데 노력을 쏟는다는 점이다. 기관 디지털미술아카이브에서도 그런 노력이 드러난다. 이용자가 소장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채널을 고민한 것 같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디지털미술아카이브 컬렉션 시각화
출처.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공식 홈페이지
성석 | 앞서 말씀하셨듯이 기증자들은 주로 전시, 즉 개인전이나 회고전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박물관은 시간이나 공간을 축으로 엮는 기획 전시를 많이 한다. 예를 들어, 기획 전시에 A, B, C 작가의 작품들이 있는데, A작가의 작품을 기증한 분 입장에서는 전시에 가보니 B작가 작품이 더 많고 A작가 작품은 하나밖에 없어 서운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B작가의 작품이 주를 이루는 전시의 맥락에서 A작가와 C작가의 작품이 나올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인식이 많이 바뀌어 기증자들도 이 정도는 이해하는 편이다.
이지은 | 활용 이야기를 하면 데이터베이스 구축해서 열람 서비스하고 전시, 출판, 교육하는 것이 기본적인 틀이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디지털 공유의 범주가 이전보다 확장된 것은 확실하다. 이제는 이런 디지털 전환의 상황에서 국내에도 영국 테이트처럼 온라인 콘텐츠에 대한 디지털 및 콘텐츠 큐레이션이 결합된 디지털 플랫폼이 필요한 상황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디지털 플랫폼 구축 사업도 똑같이 물리적인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고 서비스가 오픈될 때까지는 가시적인 성과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향후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Q. 마지막으로 실무자로서 업무상 만나게 되는 개인적인 고민이나 현안 혹은 제언이 있다면 자유롭게 공유 부탁드린다.
이지은 | 최근 개인적인 관심사는 아카이브를 원하지 않는 작가들도 있다는 점이다. 아키비스트로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라서 이분들은 왜 아카이브를 원치 않는지, 이 작가들이 원하는 기록의 형태는 무엇인지 연구해 보고 싶다.
이 자리를 빌려 꼭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아키비스트가 기록을 무결하게 관리하는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기록이 유용성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연구자나 이용자가 아카이브 조사 연구를 할 때 쉽게 접근해서 기록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아키비스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아키비스트는 이용자를 위한 조력자이다.
그리고 가장 안타까운 점은 미술 전문 아키비스트 인력의 부족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아키비스트가 지속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고용 상황이 확대되면 좋겠고 학예연구사를 비롯해 미술계 여러 전문가가 아키비스트와 협업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이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석 | 저도 비슷한 맥락에서 학예연구사와 아키비스트가 각자 무슨 일을 하는지, 업무 프로세스는 어떤지에 관해 서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 서울공예박물관 건립 시기에 아키비스트가 하는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없어서 아키비스트와 많이 부딪힌 편이었다. 초기 박물관 내부 기록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기록원 시스템과 박물관 시스템의 차이에 대해 아키비스트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니 그간 몰랐던 부분을 이해하게 됐고 배운 것도 많다. 그런데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는 학예연구사가 훨씬 더 많지 않나. 그러다 보니 아키비스트가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학예연구사들이 조직 내 소수인 아키비스트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유예동 | 아키비스트와 학예연구사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지점이 되게 달라서 오는 갈등이다. 일단 아키비스트는 정확성과 무결성으로 자료를 잘 보존하고 관리하는 게 우선순위이고 학예연구사는 그 자료를 가지고 뭔가 새로운 해석이나 기획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호 간 업무나 지향점에 대한 이해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고 조직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업무, 즉 업무분장 자체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니까 나는 이 업무를 하고 있으니까 이 업무만 끝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조직 내에서 각자 업무에 대한 공감대가 있어야만 함께 잘 돌아갈 수 있는 구조인 것 같다.
오늘 예술가나 그 유족의 기증을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엇보다 작가 살아생전에 작품이나 기록물에 관한 작가의 의사와 뜻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확인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사실 유족이 되기 전에는 이런 부분들을 많이 간과할 수밖에 없다.실제로 많은 분들이 유족의 작품이나 자료 관리에 관해 문의하는데, 일단은 작가 살아생전에 가능한 많은 부분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린다. 재단을 설립하는 일은 결국엔 지속적인 재원이 필요한 사업이다. 과연 재원 마련이 지속적으로 가능한가를 따져보는 게 가장 우선적이다. 또 재단에 예술가 유산 관리에 대한 일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다.
나가며
미팅앤토크 아카이브편에서는 작품과 기록물의 기관 ‘기증’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예술가 유산의 보존과 관리, 공유와 확산 등에 대해 2회차 연재의 지면에 다 담을 수 없는 다양하고 솔직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실제 작품 및 기록물의 수집 관리를 담당하는 미술계 현장의 아키비스트와 학예연구사의 목소리를 통해, 기증을 둘러싼 기관과 유족, 기관과 작가, 아키비스트와 학예연구사라는 여러 주체의 역할과 입장의 차이를 가늠해 볼 수 있었고 이들 사이의 갈등과 협의점, 소통의 과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차이를 수렴하며 이루어지는 기증은 결국 특별한 대가 없이 예술가의 유산이 공공재로서 보다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기를 바라는 공동의 목표와 지향점을 바탕으로 한다. 다시 말해, 예술가 유산의 의의가 오래도록 지속 가능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 연구 가치가 후대에도 의미 있게 확장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같았다. 이를 위해 예술가 생전에 명확한 방향성을 가진 기록 관리가 필수적임을 확인했고, 작가 자신과 작가 유족이 인지하고 준비해야 하는 지점들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아카이브는 정직하게 쌓아 올린 시간과 관심의 축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지식의 집합체이며 이에 관여하는 많은 이들의 노고와 기록문화에 대한 의식 없이는 지속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유산이다.
경기창작캠퍼스에서는 지난 2024년 비입주형 레지던시 교류 프로그램으로 미팅룸과 <미팅앤토크>를 진행하였다.
본 연재는 미팅룸에서 진행한 <미팅앤토크>의 기획 연재 시리즈이다.
필자 지가은은 미팅룸의 아트 아카이브 연구팀 디렉터이자 단국대학교 부설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교수이다.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교 비주얼 컬처 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연구로는 「아카이브 기억의 재현불가능성과 미래적 픽션의 재구성: 김아영과 린제이 시어스 작품 연구」, 『현대미술사연구』 55 (2024)가 있고, 미팅룸 공저 『셰어 미: 공유하는 미술, 반응하는 플랫폼』(스위밍꿀, 2019)과 『셰어 미: 재난 이후의 미술, 미래를 상상하기』(선드리프레스, 2021), 공역서 케일럽 케일리, 『갤러리 사운드』 (미진사, 2023)가 있다.